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과학’이라는 단어도 거부감이 드는데, 책 이름에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혁명’이라는 단어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했다. 더욱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와 더 친해 보이는 ‘구조’라는 단어를 보고는 숨이 턱 막혔다. 대학생이 읽어야 하는 필수도서라고 꼽힌 이 책을 읽지 않고서 2주전에 학부를 졸업한 나로써 굉장히 challenge 되는 책이었다. 지레 겁먹고 손에 잡은 책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다. 직역의 고수라고 불리시는 김명자선생님의 글이라고 하니 겸허히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역자 서문을 읽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을 읽고 나서도 내가 이해를 하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름 사회’과학도’로서 학부 4년을 보내왔는데도 불구하고 과연 나는 과학의 기역자도 모르는 것 같아 많이 부끄러웠다.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까지 ‘패러다임’이 뭐다, ‘정상과학’이 뭐다 하는 내용들이 책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물론, 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개념들이다. 이 책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다고 하니, 아주 훌륭한 고전을 읽고 있는 느낌이어서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과학혁명의 구조>
과연, 내가 생각하는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광고에서 조차 상품들의 과학성을 내세우고 있는 이 시기에 내가 아는 과학은 뭐 일까.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던데, 이러한 예를 보기만해도 과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뢰성과 권위는 굉장히 큰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던 과학은 차곡차곡 쌓아진 하나의 객관적인 결과물들이 아닐까. 또한, 합리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이 확실히 구별되는 아주 인간미 없는 분야.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산수와 수학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는 딱 떨어지게 정답이 있는 아주 어려운 분야를 과학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전의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과학의 개념을 뒤흔들어놓았다.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A가 옳다’라고 말해온 개념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A’에는 1이 더해지고, 2가 더해지면서 ‘A 가 옳다’라는 명제에 점점 힘을 실어가며 축적해나간다. 이것이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과학이라면, ‘A가 옳다’라고 생각했던 개념을 완전히 다른 ‘B가 옳다’라는 수 천 년 동안 ‘A가 옳다’가 부모인 줄 알았는데, 부모부터가 다른 새로운 아이가 수 천 년의 세월을 부정하고 한 순간에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 쿤이 말한 과학이다. 물론, 하나의 패러다임을 축적하는 데에 있어서의 과정들이 모두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발견 사이에 격론이 지나가고 수습된 형태의 과학이 정상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 후의 일련의 과정이 축적의 과정들이고 그것이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 패러다임이 위기에 봉착해 흔들리게 되었을 때, 그 패러다임에 덧붙여서 과학을 지속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아이가 탄생하게 되는 것뿐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스스로에게 자문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별 다른 알레르기 반응 없이 매우 개방적인 종류의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내가 믿고 있는 fact들이 모두 뒤바뀌어져 버린다면 어떨까?
내가 천동설을 믿고 있을 때, 지동설이라는 것이 나왔으면 나는 수긍할 수 있었을까? 혹은, 지동설이 절대적인 사실로 믿고 있는 현재에 갑자기 태양이 중심이 아닌, 우리가 모르고 있던 제 3의 행성이 나타나 우주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행성을 중심으로 태양과 지구가 돌고 있다면? 모르겠다. 마치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새로운 가설 혹은 새로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개방적이든 아니든 일단 내 생각을 뒤엎는 새로운 가설이 등장한 그 이후의 문제이고, 무엇보다 토마스 쿤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쿤의 말대로 누적적 지식의 점진적 발전이 과학이라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또는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택한 가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아예 기반을 다시 잡는 것이 아니라, 모래 위에 기존에 공들여 세운 건물이 무너질 까봐 일부만을 리모델링 하는 것처럼만 과학이 수정되어온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어깨 너머로 들은 이야기지만, 물리학을 새로 정립해야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뉴턴의 물리학을 아인슈타인 이론에 맞추어 고쳐버린 것처럼 말이다. 기존의 연구에 의한 모든 과학이 이런 것이라면, 어쩌면 ‘과학’이라고 명명되어지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첫 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나는 이러한 과정은 비단 과학에만 국한되어있다고 보지 않는다. 마치 광고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과학혁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이트맥주와 OB맥주의 과거 캠페인을 살펴보자.
하이트맥주가 출시될 때까지만 해도 OB맥주가 30년간 부동의 1위로써, Market share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소비자들에게 ‘맥주’하면 ‘OB’ 였고, ‘OB’하면 ‘맥주’였다. 이것은 마치 과학혁명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믿고 있는 하나의 가설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는 OB가 맥주시장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마치 그 시대의 절대적 진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정상과학이 위기에 닥쳐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OB맥주의 생산업체인 두산이 ‘낙동강페놀’사건으로 수질오염의 주범으로 질타를 받고 있었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사회적 담론을 이용하여 OB를 제치고, 화이트가 ‘천연암반수’라는 깨끗한 맥주라는 마케팅전략으로 58%의 Market share로써, 맥주시장의 절대강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소비자입장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써 맥주가 각인 된 것이다.
이렇듯, 소비자에게 포지셔닝 하는 전략마저도 쿤이 과학혁명의 개념을 따른다고 본다. 이 외에도 정치 경향에 따라 바뀌는 모습도, 자유주의가 수정자본주의로 바뀌는 모습도, 정복의 문화에서 모두가 공존하는 win-win의 문화로 바뀐 모습도 모두 크고 작게 패러다임의 대체로 인해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지금의 것(패러다임)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부딪혀야지만 과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 여기서 패러다임의 우위를 과학의 발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패러다임이 화두로 꺼내지는 것 자체를 발전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채택한 기존과는 다른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